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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교회의 대형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골에도 웅장한 교회건물은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로 무지 막지하게 크다. 그만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내가 다니는 교회만 해도 몇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대형교회이다. 교회를 매매하는 것 또한 오래된 관습중 하나이다. 교회 부동산은 특이하게도 평수와 지리적 위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수와 헌금액수에 따라 금액이 결정된다.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만성화가 되었는지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은행들이 절이나 교회등를 상대로한 상품들을 만든다는 내놓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미 순복음교회에서는 은행창구까지 있을 정도로 전문화 되어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십일조 적금, 주일 헌금 펀드등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어이가 없다. 내가 다니는 교회만 해도 중대형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한 주에 걷히는 헌금은 보통 1억이 넘는다. 한달이면 4억이다. 미루어 짐작하여 보통 스타급 대형교회는 몇십억이 걷힐 것이다. 그러니 은행에서 눈독을 들일만도 하다.
 
대형교회안에 서점이나 카페등의 문화공간을 만드는게 유행이 된적이 있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증축하면서 여러 문화공간들을 넣는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교회사람이 대부분이다. 교회의 상업화는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짧은 성경 지식으로도 성전안에서 비둘기나 여러 상인들이 물건을 팔자, 예수님은 매우 화를 내며 그들을 내쫓으셨고, 거룩하게 지키라 하셨다. 반면 지금의 교회들은 교회안에서 물건을 파는 것을 선교헌금이라는 빌미하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세련된 교회의 한 모습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임대 수익 선교헌금으로만 쓰면 모든 것이 합리화?

이런 교회의 대형화를 넘어 이제는 쇼핑몰화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에는 이런 교회들이 즐비하다고 하는데 내가 가보았던 미국에는 그런 교회는 거의 없었다. 미국이 워낙이 크니 그런 교회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미국을 따라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교회가 쇼핑몰을 만들어 그 수익을 선교헌금 및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관리 또한 한다는 것인데 취지야 어찌되었든 그 정도면 교회가 아니라 기업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최근 교회를 증축하면서 몇십층짜리 초대형 교회를 짓고 건물 안에 공간을 임대함으로 임대수익을 얻으려는 교회도 생겨나고 있다. 3,40층 짜리 교회 건물이 생겨나며 너무 큰 나머지 남는 층은 임대를 놓겠다는 것이다.

마치 맥도널드가 더이상 햄버거를 파는 곳이 아니라 부동산을 파는 곳인 것처럼, 교회도 더 이상 기독교인이 모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부동산 및 쇼핑몰 그리고 기업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변명은 참 구차하다. 보통 가장 잘 먹히는 변명은 그 수익을 선교헌금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혹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라고 한다.

한달에 수십억씩 헌금을 받아내면서 그것도 모잘라서 임대사업에 금융사업 및 상행위까지 해야 선교헌금을 낼 수 있다니 외국 오지에서 근근히 살아가시는 선교사님들을 보면 그 돈이 다 어디로 갈까 의문이 든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도 한달에 파송받은 교회로부터 나오는 금액은 10만원이 채 안된다.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역사회는 과연 혜택을 받고 있을까? 혜택은 커녕 위화감만 더욱 조성되는 것 같다. 때때되면 선심쓰듯이 쌀이나 생필품을 전달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엔 주차난 및 소음으로 지역사회에 피해만 주고 있다.

종교와 경제의 유착

중세에 종교와 정치가 유착되어 권력을 획득하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 골라하던 그 때와 지금이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종교와 정치의 유착 뿐아니라 종교와 경제 또한 그러하여 종교속에 돈이 흘러 넘치고 있다. 교회 뿐 아니라 절이나 기타 여러 종교들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긴하다. 종교가 돈을 밝히면 종교로서의 기능은 약해지게 된다. 이유는 설명 안해도 대충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대형 교회들은 덩치만 컸지 영적인 능력은 최악이다. 신앙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데, 그 껍데기가 너무도 화려하다. 그리고 그 야욕과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돈이라는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 결국은 인생이 허무해지듯, 돈만 밝히는 교회들은 결국 덩치는 커질지언정 결국엔 허무하게 될 것이다.

장로들과 목사는 욕을 해대며 싸우고, 장로가 되려면 돈으로 쳐 발른 선거활동을 해야만 하고, 후보에 오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내야 하는 돈도 수백, 수천만원이다. 장로가 되면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주차위원 행색만 내며 교회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 하고, 교회의 행정은 자기 돈이 아니라고 회식하는데에 법인카드마냥 긁어댄다. 한주에 헌금만 1억이니 써도 써도 끝이 없지 않겠는가. 성도들이 낸 귀한 헌금은 장로 및 특정 집단의 뱃속을 채우는데 사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버젓이 온갖 음식과 책, 커피, 잡동사니등을 선교헌금이라는 명목하에 판매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라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하나님이 임대 사업자가 된 교회

이제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임대수입을 나눠주어 그들의 뱃속을 채워주는 임대 사업자가 된 것 같다.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교회들은 십계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십계명을 거꾸로 하면 사단의 십계명이 된다. 지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십계명을 하나씩 거꾸로 지켜가고 있는 것 같다. 거짓말과 욕심이 넘치는 그곳에 하나님은 없고, 사단의 유혹만이 가득할 뿐이다.

어느 교회는 청년들이 하도 많아 올바른 기독교 청년 문화를 정착시키자는 명목하에 문화센터같은 것을 교회에 따로 만들겠다고 한다. 참 좋은 취지이나 그 문화는 기독교안에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문화센터를 만드는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이 제대로 갖춰진 청년들이 세상에 나아가 그들이 모이는 곳에 그런 가치관을 전한다면 그런 문화는 사회 곳곳에 일어날 것이다. 문화는 건물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세계 선교운동의 일환으로 백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란 것이 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지상명령은 지구를 한바퀴돌아 복음이 시작되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명령을 완수하고 천국이 도래할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운동이다. 하지만 백투 예루살렘 이전에 백투 지저스(back to jesus), 백투 바이블(back to bible)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보자. 교회가 왜 커질까? 왜 대형화가 일어날까?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바로 욕심이다. 명분은 좋다. 복음을 널리 전하여 많은 성도가 생겨나서 교회가 좁으니 더 키워야만 했다고... 내 설교를 들어야, 우리 공동체로 들어와야, 우리 교회로 와야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욕심일 뿐이다. 왜 주변에 교회들이 이렇게 많고, 시골에는 한 주, 한 주 겨우 버텨가는 교회들만 있는 것일까? 교회의 집중화가 아닌 분산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를 키워가는 것보다 이미 있는 교회들로 분산화시켜 나가는 것이 더 바른 방향일 것이다. 지역사회를 위한다면 지역을 위해 교회가 아닌 별도로 복지시설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환원을 시킬 수도 있다. 이슈가 되고 있는 교회 세금은 먼저 내는 것도 환원의 한 방법이고, 돈이 없는 작은 교회들이 못내는 세금까지 한꺼번에 주변 대형교회가 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 외에도 방법은 많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자꾸 변명과 합리화만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과 함께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또한 더 이상 회계가 아닌 회개를 해야만 한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라. 무엇이 두려워서 교회안에 자꾸 수익구조를 만드는 것인가. 경제는 경제인들에게 맡기고, 교회는 종교의 본연의 임무로 철저히 돌아가야 한다.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것은 교회가 아닌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나서서 무얼 해보았자 욕만 먹고, 위화감만 조성한다. 성도들을 잘 양육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40층 짜리 교회, 쇼핑몰을 겸하는 교회, 교회안에 문화센터를 짓겠다는 교회, 프렌차이즈화 시킨 교회, 금융 대국 교회등이 더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는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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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후에서 다룬 대형 교회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대중은 기독교에 대해 등을 돌렸다.
게시판의 글을 한 사람이 도배하는 건지, 여러 사람의 의견인지 모르겠지만, 댓글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대부분 기독교를 비하한 "개독교"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하면 20여년 전만해도 "가난"의 대명사격 정도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대형교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의하면 대형교회들의 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하면 "부의 중심" 혹은 "권력의 중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학대학교의 입학 커트라인에서도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90년대만해도 매우 낮았고, 듣기론 1960년대엔 대학을 다 떨어진 사람들이 거저(?)가는 곳이 신학대학교였다. 그리고 그 당시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현재 대형교회들의 목사를 하고 있다. 목사의 자질에 대해서는 내가 논할 바는 아니기에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차산에 있는 장신대의 신학과만 하더라도 서울의 왠만한 4년제 대학 수준의 커트라인은 된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다. 내 주위에도 수많은 신대원(신학대학원) 재수생들이 있다.

물론 대형교회가면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라는 의식에서 신학대학들의 커트라인이 높아진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각자의 사명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60년대 신학대학을 다녔던 현재의 목사님들보다 더 현명한 목사님들이 되어 지금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왜 유독 대형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길까? 많은 변명들이 있겠지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도대체 교회가 왜 커져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브랜드 교회를 양성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야 할 것이다.

한 교회에 수천명, 수만명하는 신도들이 있다는 건 목사와 신도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많이 있으면 힘이 생긴다. 그리고 욕심이 생긴다. 한 주에 걷히는 헌금이 수십억을 넘어가면 당연히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수만명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한다면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대형교회 및 여느 교회들의 특징은 설교시간에 꼭 "우리교회"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를 부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져야지, 그게 왜 꼭 우리 교회 신도들이 많아져야 하는가? 그들의 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장로교 교회에서 장로가 되면 죽을 때까지 장로가 되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장로가 되기 위해 장로선거에 수천만원의 로비가 들어가는 것 또한 아는가? 장로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기를 쓰고 장로가 되려고 할까? 물론 일부 장로님들이 그러시겠지만, 분명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장로가 되면 파워가 생긴다.

 만약 내가 교회용품 회사 사장이라면, 기를 쓰고 장로를 할만하지 않겠는가? 의자 새걸로 싹 바꾸면 회사 10년 매출이 순식간에 생긴다. 예를 든 것 뿐이지만, 이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병폐들이 많다. 그런 파워가 평생 지속된다면... 수천만원은 아주 작은 투자일 뿐이다.


 파보면 끝이 없다. 뉴스후는 이 문제로만 하나의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병폐의 끝은 깊고 단단하다. 대형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형교회를 쪼개면 된다. 잘게 잘게 쪼개어 한 교회당 300명 이하의 신도만 받을 수 있게 하고, 장로는 매년 투표로 재선임하고, 목사는 한 교회에서 3년에 한번씩 로테이션 시킨다면 대형교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독교인 한명 한명이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목사와 장로가 화해하고, 목사와 사역자들의 관계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이 되어야 하고, 신도를 모으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신도는 흩어지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아닌, 더 기독교적이 되어야 한다. 세금만 내면 기독교적인가? 목사 월급 공개하면 기독교적인가? 무엇이 기독교적인지 스스로 알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독교의 참모습을 회복하길 바란다. 기독교는 자기들만의 리그가 아닌 세상을 향한 사랑의 외침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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