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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후 안티카페, 어린이 안티카페는 왜 생기는 것일까?
TV익사이팅
2013. 6. 1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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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윤후 안티카페가 생겼다가 수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고 카페를 폐쇄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었다. 네티즌들은 "윤후 사랑해"라는 키워드를 검색하여 윤후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돕기도 했다. 안티카페를 만든 사람은 생각없이 만들었고, 카페는 누구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의사 표현하는 것은 자유라는 취지로 운영되어 왔다고 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1. 어린이 안티카페 왜 생기는 것일까?
어린이에 대해 안티카페가 생겨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이는 아직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고, 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손과 발로 어린이를 집단으로 구타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린이 안티카페가 생겨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어린이 안티카페가 생겨나고 있다. 좀 더 안티카페들을 살펴보면 만화 캐릭터에도 안티카페가 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안티카페가 있다. 유재석이나 김연아같은 무결점 스타들에게도 안티카페가 있다. 심지어 선생님이나 부모님같은 주변인들에 대한 안티카페도 있다고 한다. 안티카페는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다.
안티카페는 일종의 놀이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의 합리화는 "누구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유"라는 생각이다. 대상의 상황이나 상태가 어떻든 주관적으로 싫으면 그것을 표현하고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악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실은 악플러들의 집합소가 안티카페나 다름없다. 같은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도덕성은 생각보다 굉장히 낮다. 집단이 되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이런 집단의 상황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익명성과 집단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제공이라는 인터넷의 그림자는 안티카페가 나오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카페에 가입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으며 공감받을 수 있다. 안티카페의 운영 원칙 중 하나가 "욕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것이다. 즉, 배설물을 쏟아놓는 화장실 같은 곳을 만든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공감되는 일을 전파시킬 수 있는 SNS의 발달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2. 아역 안티카페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아역 안티카페는 카페라는 인터넷 공간이 생긴 이래 계속 생겨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은 성인이 된 지금 안티카페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아역 안티카페"로만 검색해도 2003년부터 안티카페가 있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역 안티카페"라는 제목을 넣지 않은 아역 안티카페까지 생각해본다면 더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도 윤후 안티카페 뿐 아니라 윤후보다 1살 어린 박민하에게도 안티카페가 생겼다. 아역 스타들이었던 진지희나 김유정, 김소현등도 아역 시절 악성댓글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들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3. 최근에만 생긴 것일까?
이런 일은 비단 최근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이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응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을 뿐이다. 카페가 있기 전에는 왕따라는 형태로 존재해왔다.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의 집단이 바로 왕따의 현장인 것이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로 인기를 끌었던 김성은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아역들에겐 항상 이전부터 있어왔던 현상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신의 열등감을 표현하는 출구를 원하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다. 사회는 피라미드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꼭지점으로 가는 사람을 성공이라 부르고, 그곳에 올라가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다. 때로는 아래 있는 사람을 발로 밟기도 한다.
오래 전부터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있어왔고, 이는 인간의 본성과 거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요즘 교육은 입시와 취업에만 맞춰져 있는 기술적인 문제 해결 능력만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윤리에 관한 교육은 입시나 취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교육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인터넷은 점차 발전되고 있고, 사회적 프레임은 성공이란 잣대를 양육강식이란 방정식을 풀어가는데에 있으니 음성적이었던 일들이 양성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요즘의 실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다. 약자를 보호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교육과 사회의 프레임이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로서 인식할 때 조금씩 이런 현상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선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회복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1. 어린이 안티카페 왜 생기는 것일까?
어린이에 대해 안티카페가 생겨서는 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이는 아직 보호받아야 할 존재들이고, 약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손과 발로 어린이를 집단으로 구타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이 어린이 안티카페가 생겨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어린이 안티카페가 생겨나고 있다. 좀 더 안티카페들을 살펴보면 만화 캐릭터에도 안티카페가 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안티카페가 있다. 유재석이나 김연아같은 무결점 스타들에게도 안티카페가 있다. 심지어 선생님이나 부모님같은 주변인들에 대한 안티카페도 있다고 한다. 안티카페는 이유를 불문하고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다.
안티카페는 일종의 놀이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그것의 합리화는 "누구든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유"라는 생각이다. 대상의 상황이나 상태가 어떻든 주관적으로 싫으면 그것을 표현하고 표출하는 것이다. 이는 악플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실은 악플러들의 집합소가 안티카페나 다름없다. 같은 의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모이게 되는 것이다.
집단의 도덕성은 생각보다 굉장히 낮다. 집단이 되면서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발달은 이런 집단의 상황을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익명성과 집단이 모일 수 있는 장소 제공이라는 인터넷의 그림자는 안티카페가 나오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카페에 가입한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으며 공감받을 수 있다. 안티카페의 운영 원칙 중 하나가 "욕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것이다. 즉, 배설물을 쏟아놓는 화장실 같은 곳을 만든 것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서 공감되는 일을 전파시킬 수 있는 SNS의 발달은 이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시킬 것으로 생각된다.
2. 아역 안티카페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아역 안티카페는 카페라는 인터넷 공간이 생긴 이래 계속 생겨왔다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아역배우들은 성인이 된 지금 안티카페에 대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아역 안티카페"로만 검색해도 2003년부터 안티카페가 있어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아역 안티카페"라는 제목을 넣지 않은 아역 안티카페까지 생각해본다면 더 이전부터 있었을 것이다.
최근에도 윤후 안티카페 뿐 아니라 윤후보다 1살 어린 박민하에게도 안티카페가 생겼다. 아역 스타들이었던 진지희나 김유정, 김소현등도 아역 시절 악성댓글로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기들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3. 최근에만 생긴 것일까?
이런 일은 비단 최근에만 일어난 일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그것이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응집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을 뿐이다. 카페가 있기 전에는 왕따라는 형태로 존재해왔다.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들의 집단이 바로 왕따의 현장인 것이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로 인기를 끌었던 김성은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아역들에겐 항상 이전부터 있어왔던 현상인 것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자신의 열등감을 표현하는 출구를 원하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의 시대에서 강한 자만이 살아남든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든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져 있다. 사회는 피라미드 형식으로 되어 있고, 그 꼭지점으로 가는 사람을 성공이라 부르고, 그곳에 올라가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라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고 떨어뜨리려 하는 것이다. 때로는 아래 있는 사람을 발로 밟기도 한다.
오래 전부터 질투심이라는 형태로 있어왔고, 이는 인간의 본성과 거의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교육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하지만 요즘 교육은 입시와 취업에만 맞춰져 있는 기술적인 문제 해결 능력만을 요구한다. 도덕이나 윤리에 관한 교육은 입시나 취업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되어 있다. 교육이 되지 않는 상태에서 인터넷은 점차 발전되고 있고, 사회적 프레임은 성공이란 잣대를 양육강식이란 방정식을 풀어가는데에 있으니 음성적이었던 일들이 양성적으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 요즘의 실정인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은 우리 안에 있다. 약자를 보호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사회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지속적인 교육과 사회의 프레임이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로서 인식할 때 조금씩 이런 현상들이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선 서로 돕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회복이 먼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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