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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완생. 인생은 그런 것 같다. 완생이 되기를 희망하는 미생들의 바둑 한판. 미생은 드라마에서조차 완벽한 드라마 공식을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의 기본 공식이라면 러브라인과 출생의 비밀, 신데렐라와 권선징악 정도가 될 것 같다. 하지만 미생은 그 흔한 러브라인조차 없다. 안영이와 장그래의 이름은 안영이가 "안녕"하고 말하면 장그래는 "그래"하고 쿨하게 헤어질 수 있는 그런 관계를 뜻해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렇다. 미생에 러브라인조차 미생인 것이다. 어두침침하고 싸늘하고 회색빛 도시를 거니는 슬픈 우리들의 자화상. 참으로 보고 싶지 않을 듯한 드라마인데 가슴이 먹먹해지며 너무 심하게 공감하는 나머지 눈물까지 나버리는 그런 드라마이다. 이 미생은 이제 5%를 넘어서는 기염을 토하며 tvN의 대표 드라마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원작을 뛰어넘는 리메이크 드라마. 원작인 웹툰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영상에서만 볼 수 있는 호흡이 미생의 강점이자 인기 요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말 러브라인이 없을까? 자세히 찾아보면 있다. 그건 바로 장그래와 오과장의 러브라인. 미생의 8할은 오상식을 맡은 이성민이라 할 수 있을만큼 거의 미친듯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웹툰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웹툰과 유일하게 싱크로율이 맞지 않는 것이 이성민이다. 이성민이 그린 오상식은 웹툰 미생의 오과장이 아니라 이성민의 오과장이기 때문이다. 항상 출혈된 것이 트레이드마크인 오과장의 눈이 벌건 것 또한 첫회의 첫장면에서만 잠시 보여주고, 바로 안약을 넣으면서 그 다음부터는 충혈된 눈이 보이지 않는다. 프리퀄에서 보여주었던 오과장에서는 충혈된 눈을 잘 표현해주었는데, 이성민은 그걸 다르게 표현해주었다. 


충혈된 눈이란 항상 피곤에 쩔은 상태를 표현해준다. 웹툰에서 그 캐릭터의 피곤함과 호러스러움을 표현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충혈된 눈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렸지만 이성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영상에서까지 피곤함과 호러스러움을 충혈된 눈으로만 표현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연기의 감정을 가리는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성민은 과감하게 충혈된 눈을 버리고 자신만의 오상식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과도한 의욕, 마초같은 성격, 한없이 작아지는 가장, 신념을 가진 돈키호테, 졸다가 졸도하고 코피까지 흘리는 피곤에 쩔은 상태... 그 모든 것을 그냥 연기로 표현해버리면서 자신만의 오과장을 만들어갔다. 


그래서 미생에서 가장 인기있고,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사람은 바로 오과장이다. 오과장은 사람에 대한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 일에 대해서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기에 일처리 하나는 똑뿌러지게 하지만 자신의 신념에 대한 단호함도 있기 때문에 상사에게 아부를 하거나 바이어에게 2차 접대를 하는 일은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만년 과장에 승진을 못하고 있다. 대신 사람에 대해서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 





고졸에 스펙도 없고, 자신과 제일 껄끄러운 전무의 낙하산으로 들어온 장그래에 대해 오과장은 처음엔 싫어하지만 점점 장그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장그래의 진심을 알아가면서 오과장의 마음은 열리기 시작했고, 다른 동료나 사람들은 점점 장그래에게 등을 돌리고 차가워질 때 오과장은 반대로 마음을 열고 장그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해주고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 넣어준 오과장의 진심을 본 장그래는 영업 3팀에 충성하는 상사맨이 된다. 


미생에서 장그래는 안영이와 러브라인을 그릴 듯 싶었으나 오히려 오과장과 썸을 타기 시작한다. 미생을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는 많은 제작사에게 러브콜을 받았지만 김원석PD에게만 미생을 만들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른 PD들은 모두 러브라인을 넣길 원했다고 한다. 드라마의 기본공식이니 당연히 러브라인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는 미생에 러브라인이 들어가길 원치 않았고, 그간 미생이 드라마나 영화로 나오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원석PD는 처음부터 러브라인을 절대로 넣지 않겠다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서 미생을 맡길 수 있었고, 지금과 같이 러브라인 없이도 미친 시청률을 보여주는 드라마가 되었다. 물론 장그래와 오과장의 러브라인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오과장은 모든 신입에게 관심을 가진다. 자원팀에서 여자라고 거의 왕따 당하는 안녕이에게 항상 먼저 손을 내밀고, 영업 3팀으로 오라고 계속 러브콜을 보낸다. 철강팀의 장백기에게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한석율은 이미 오과장의 속속들이를 다 알고 있을 정도다. 오과장은 신입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약자에게는 보호를, 강자에게는 다리를 걸어 하체 부실을 놀려댄다. 사람에 대한 유연함은 사람의 마음을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성장시켜주기도 한다. 


장그래는 바둑의 세계에서 나와 냉혈하고 무자비한 사회에서 갈기 갈기 찢길 뻔 했으나 오과장을 만남으로 인해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다. 앞으로 장그래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오과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과장과 장그래의 러브라인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장그래는 점점 성장해가는 것이다. 


오과장은 참 애틋하다. 혹자는 말한다. 그건 말도 안되는 미화된 이야기라고... 잘못을 감싸주는 그런 사람이 실제 직장에서 어디있냐며 격양되기도 한다. 그럴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오과장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람에 대한 유연함을 가지고 자신의 신념에 대한 단호함을 가진 유단자가 없기 때문이다. 오과장을 보면 때로는 우리의 아버지 같다. 자식을 위해 상사에게 혹은 바이어에게 머리를 숙이며 접대를 하고 아부를 해야 하는 자존심 버린 자존심 강한 우리 아버지. 자다가 졸도를 하면서 코피까지 흘리지만 자식 앞에서는 항상 강한 천하무적 아버지말이다. 또한 오과장은 때론 남편같다. 속썩이고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 매일 술에 찌들어 주말에는 잠만 자는 남편. 쇼파와 하나된 남편... 





하지만 가장 슬플 때는 그 모습이 나의 모습과 같게 느껴질 때다. 매일 챗바퀴 굴러가는 하루를 살지만 그 챗바퀴를 돌리기 위해 치열하게, 피 터지게 일해야 한다. 때론 내 동료를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신념을 버리기도 해야 하는 상황에 맞딱들이고, 건강은 사치일 뿐이며, 1000년을 살 수 있을 것 같이 일하고 또 일하고 있는 나의 모습일 때가 가장 슬프다. 


오과장 또한 장그래를 통해 성장할 수 있을 것인가. 오과장이 말하는 듯하다....


"당신들이 술맛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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