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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 교회의 대형화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골에도 웅장한 교회건물은 위화감을 조성할 정도로 무지 막지하게 크다. 그만큼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많아서일까. 내가 다니는 교회만 해도 몇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오고가는 대형교회이다. 교회를 매매하는 것 또한 오래된 관습중 하나이다. 교회 부동산은 특이하게도 평수와 지리적 위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수와 헌금액수에 따라 금액이 결정된다.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매우 충격적이었는데, 이제는 만성화가 되었는지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얼마 전 신문에서 은행들이 절이나 교회등를 상대로한 상품들을 만든다는 내놓겠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미 순복음교회에서는 은행창구까지 있을 정도로 전문화 되어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십일조 적금, 주일 헌금 펀드등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어이가 없다. 내가 다니는 교회만 해도 중대형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한 주에 걷히는 헌금은 보통 1억이 넘는다. 한달이면 4억이다. 미루어 짐작하여 보통 스타급 대형교회는 몇십억이 걷힐 것이다. 그러니 은행에서 눈독을 들일만도 하다.
 
대형교회안에 서점이나 카페등의 문화공간을 만드는게 유행이 된적이 있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증축하면서 여러 문화공간들을 넣는다. 지역사회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교회사람이 대부분이다. 교회의 상업화는 벌써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짧은 성경 지식으로도 성전안에서 비둘기나 여러 상인들이 물건을 팔자, 예수님은 매우 화를 내며 그들을 내쫓으셨고, 거룩하게 지키라 하셨다. 반면 지금의 교회들은 교회안에서 물건을 파는 것을 선교헌금이라는 빌미하에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이 세련된 교회의 한 모습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임대 수익 선교헌금으로만 쓰면 모든 것이 합리화?

이런 교회의 대형화를 넘어 이제는 쇼핑몰화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에는 이런 교회들이 즐비하다고 하는데 내가 가보았던 미국에는 그런 교회는 거의 없었다. 미국이 워낙이 크니 그런 교회들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미국을 따라할 필요까지야 있을까. 교회가 쇼핑몰을 만들어 그 수익을 선교헌금 및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관리 또한 한다는 것인데 취지야 어찌되었든 그 정도면 교회가 아니라 기업이다. 또한 국내에서도 최근 교회를 증축하면서 몇십층짜리 초대형 교회를 짓고 건물 안에 공간을 임대함으로 임대수익을 얻으려는 교회도 생겨나고 있다. 3,40층 짜리 교회 건물이 생겨나며 너무 큰 나머지 남는 층은 임대를 놓겠다는 것이다.

마치 맥도널드가 더이상 햄버거를 파는 곳이 아니라 부동산을 파는 곳인 것처럼, 교회도 더 이상 기독교인이 모이는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부동산 및 쇼핑몰 그리고 기업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교회의 변명은 참 구차하다. 보통 가장 잘 먹히는 변명은 그 수익을 선교헌금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혹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라고 한다.

한달에 수십억씩 헌금을 받아내면서 그것도 모잘라서 임대사업에 금융사업 및 상행위까지 해야 선교헌금을 낼 수 있다니 외국 오지에서 근근히 살아가시는 선교사님들을 보면 그 돈이 다 어디로 갈까 의문이 든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선교사님도 한달에 파송받은 교회로부터 나오는 금액은 10만원이 채 안된다. 대형교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역사회는 과연 혜택을 받고 있을까? 혜택은 커녕 위화감만 더욱 조성되는 것 같다. 때때되면 선심쓰듯이 쌀이나 생필품을 전달해주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평소엔 주차난 및 소음으로 지역사회에 피해만 주고 있다.

종교와 경제의 유착

중세에 종교와 정치가 유착되어 권력을 획득하고 온갖 더러운 짓을 다 골라하던 그 때와 지금이 별반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이제는 종교와 정치의 유착 뿐아니라 종교와 경제 또한 그러하여 종교속에 돈이 흘러 넘치고 있다. 교회 뿐 아니라 절이나 기타 여러 종교들도 이런 문제를 가지고 있긴하다. 종교가 돈을 밝히면 종교로서의 기능은 약해지게 된다. 이유는 설명 안해도 대충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대형 교회들은 덩치만 컸지 영적인 능력은 최악이다. 신앙은 없고, 껍데기만 있는데, 그 껍데기가 너무도 화려하다. 그리고 그 야욕과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돈이라는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 결국은 인생이 허무해지듯, 돈만 밝히는 교회들은 결국 덩치는 커질지언정 결국엔 허무하게 될 것이다.

장로들과 목사는 욕을 해대며 싸우고, 장로가 되려면 돈으로 쳐 발른 선거활동을 해야만 하고, 후보에 오르기 위해 기본적으로 내야 하는 돈도 수백, 수천만원이다. 장로가 되면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가 주차위원 행색만 내며 교회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 하고, 교회의 행정은 자기 돈이 아니라고 회식하는데에 법인카드마냥 긁어댄다. 한주에 헌금만 1억이니 써도 써도 끝이 없지 않겠는가. 성도들이 낸 귀한 헌금은 장로 및 특정 집단의 뱃속을 채우는데 사용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 버젓이 온갖 음식과 책, 커피, 잡동사니등을 선교헌금이라는 명목하에 판매하고 있고, 그것이 당연한 듯 생각하고 있다. 어떠한 이유라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 아닌 하나님이 임대 사업자가 된 교회

이제 교회에서 하나님의 역할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임대수입을 나눠주어 그들의 뱃속을 채워주는 임대 사업자가 된 것 같다.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교회들은 십계명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십계명을 거꾸로 하면 사단의 십계명이 된다. 지금의 대형교회들을 보면 십계명을 하나씩 거꾸로 지켜가고 있는 것 같다. 거짓말과 욕심이 넘치는 그곳에 하나님은 없고, 사단의 유혹만이 가득할 뿐이다.

어느 교회는 청년들이 하도 많아 올바른 기독교 청년 문화를 정착시키자는 명목하에 문화센터같은 것을 교회에 따로 만들겠다고 한다. 참 좋은 취지이나 그 문화는 기독교안에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문화센터를 만드는게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이 제대로 갖춰진 청년들이 세상에 나아가 그들이 모이는 곳에 그런 가치관을 전한다면 그런 문화는 사회 곳곳에 일어날 것이다. 문화는 건물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세계 선교운동의 일환으로 백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란 것이 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성경의 지상명령은 지구를 한바퀴돌아 복음이 시작되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명령을 완수하고 천국이 도래할 것이란 생각에서 나온 운동이다. 하지만 백투 예루살렘 이전에 백투 지저스(back to jesus), 백투 바이블(back to bible)이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생각해보자. 교회가 왜 커질까? 왜 대형화가 일어날까? 이유는 하나일 것이다. 바로 욕심이다. 명분은 좋다. 복음을 널리 전하여 많은 성도가 생겨나서 교회가 좁으니 더 키워야만 했다고... 내 설교를 들어야, 우리 공동체로 들어와야, 우리 교회로 와야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욕심일 뿐이다. 왜 주변에 교회들이 이렇게 많고, 시골에는 한 주, 한 주 겨우 버텨가는 교회들만 있는 것일까? 교회의 집중화가 아닌 분산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교회를 키워가는 것보다 이미 있는 교회들로 분산화시켜 나가는 것이 더 바른 방향일 것이다. 지역사회를 위한다면 지역을 위해 교회가 아닌 별도로 복지시설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 환원을 시킬 수도 있다. 이슈가 되고 있는 교회 세금은 먼저 내는 것도 환원의 한 방법이고, 돈이 없는 작은 교회들이 못내는 세금까지 한꺼번에 주변 대형교회가 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 외에도 방법은 많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자꾸 변명과 합리화만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과 함께 성경으로 돌아와야 한다. 또한 더 이상 회계가 아닌 회개를 해야만 한다. 교회의 순수성을 지켜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라. 무엇이 두려워서 교회안에 자꾸 수익구조를 만드는 것인가. 경제는 경제인들에게 맡기고, 교회는 종교의 본연의 임무로 철저히 돌아가야 한다.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것은 교회가 아닌 교회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교회가 나서서 무얼 해보았자 욕만 먹고, 위화감만 조성한다. 성도들을 잘 양육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40층 짜리 교회, 쇼핑몰을 겸하는 교회, 교회안에 문화센터를 짓겠다는 교회, 프렌차이즈화 시킨 교회, 금융 대국 교회등이 더이상 나오지 않길 바란다.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는 우리 마음속에만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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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오전 11시쯤 경희대에서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중국인들이 오늘 따라 유난히 많이 보였다. 3~40명 정도의 인원이 빨간색 중국 깃발 수십개를 위협스럽게 들고 지하철 쪽으로 향했다. 지하철로 들어서니 여기 저기 또 다시 많은 중국인 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지하철 노선으로 갈아탈때도 깃발을 든 중국인들이 여기 저기 눈에 띠었다. 중국인 유학생의 날인가 보구나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성화봉송이 오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 일어났던 성화봉송 피해도 생각이 났다. 득의양양하게 무리지어 깃발들고 걸어다니는 그들을 보니 심히 걱정스러웠다. 대부분 껄렁껄렁하고 험악한 표정으로 지나다녔기 때문이다.

올림픽 성화봉송과 티베트 사태는 전세계인 대 중국인의 맞짱 대결 구도로 점차 윤곽이 잡혀가고 있다. 올림픽 날짜는 다가오는데 성화봉송을 따라 전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이 올림픽을 망치고 있는 꼴이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인파와 횡포 그리고 그들에게 당한 대한민국 국민들만 보아도 어떻게 될지 예상해 볼 수 있다. 올림픽과 중국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던 그나마 소수의 인원들도 오늘 그들의 횡포를 통해 안티 올림픽, 안티 중국으로 다 돌아섰을 것이다. 폭력과 무력이 모든 것을 정당화 시킨다는 그들의 사상과 가치관, 그리고 윤리가 이번 사태를 통해 여과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횡포에 대해 중국인들은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자기 반성이 이루어져야 겠지만, 오늘의 단합된 횡포를 보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늘 집회를 이루었던 5천여명의 중국인들은 한국 대학에 온 유학생들이었다. 대학생인 것이다. 나름대로 유학을 온 중국인들이고, 그들은 아마도 중국에서 상류층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중국에서 대학을 못가서 도피성으로 온 사람들도 있고, 나름 지식인의 대열에 합류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미래를 이끌 주역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중국의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티베트 문제는 국가의 분단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폭력과 무력시위를 벌이는 그들은 매우 단순하고 근시안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면 그들의 얼굴 모습이 가히 가관이다. 필사적으로 악이 바쳐있는 얼굴은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광분하는지 의문스럽게 만든다. 이 문제는 결국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 올림픽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고, 중국 자체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되리라는 것까지 염두하지 않은 어린 생각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 애국을 원했다면 전세계의 언론이 주목되어 있는 곳에서 올림픽을 열어도 될만한 곳이라는 시민의식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한국에 있는 일명 좀 살고 좀 배웠다는 무리들도 이런데, 본국에 있는 사람들은 더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무서워서 중국 올림픽 참관하려던 사람들도 마음을 돌릴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의 무력과 횡포속에는 돌이 아닌 스패너가 있었다. 그 말은 이 집회는 성화봉송을 구경하려온 집회가 아닌 처음부터 계산된 행동이었다는 것이다. 명목은 성화봉송 참관이었지만, 그들이 던진 것은 돌이 아닌 스패너였다. 바닥에 스패너가 떨어져 있을리도 없고, 그것은 철저하게 계획되고 계산된 무력 집회였고, 폭력 시위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무리지어 움직일 때 모습은 순수한 대학생이 아닌 동네 양아치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집회를 통해 그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첫째, 중국인들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5천명이 단합된 목소리로 구타와 협박을 당연하게 이루는 모습을 보며 무리에 속하여 비윤리와 부도덕을 합리화시키고 스스로 애국한다고 착각에 빠져드는 우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티베트인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듯이, 전세계인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모습을 언론을 통해 전국,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둘째, 티베트가 중국 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들의 명분은 티베트로 인한 조국의 분단 문제였다. 그렇다면 자국민을 그렇게 무참히 구타하고 욕설하는 것이 중국은 하나라는 그들의 명분과 상반되지 않는가? 티베트가 중국이라는 한 나라 사람이라면 왜 그들을 때리고 욕하는가? 자국민을 때리고 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예밖에 없다. 그들은 티베트를 자신들의 한 국가로 생각하지 않고, 때리고 욕해도 괜찮은 노예로 생각하고 있고, 티베트인 뿐 아니라 한족을 제외한 소수민족에 대한 그들의 속마음이기도 한 것이다. 명분이 어찌되었든 결국 그들의 무력과 폭력은 전세계 사람들이 중국과 티베트는 다른 나라여야만 한다는 굳은 의지만 심어주었다. 예를들어, 길거리에서 뚱뚱한 아이가 외소한 아이를 무지막지하게 때리고 있는데, 뚱똥한 아이는 외소한 아이를 때리며 이 아이는 내 동생이기 때문에 때려도 된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면,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하며 '더 맞아야 겠네'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그 둘을 갈라놓으며, 뚱뚱한 아이를 꾸짖을까? 그들이 설령 정말 형제라해도 사람들은 그 둘을 갈라놓을 것이다.

셋째, 올림픽 홍보 제대로 했다.
올림픽에 대해 홍보를 제대로 한 것 같다. 올림픽에서 1등은 중국이 떼어놓은 당상이다. 꼴로 보아하니 올림픽 정신은 오간데 없고, 중국과 붙는 팀은 무조건 집단 야유와 깡통, 스패너등으로 상처를 입을테니 말이다. 원칙도 윤리도 정신도 없는 올림픽에 온갖 반칙과 더티 플레이가 나올 것이고, 중국인들은 자국의 승리와 단합이라는 것을 명목으로 무리지어 무력으로 합리화시킬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포터즈끼리의 집단 유혈사태는 안봐도 비디오다. 전세계인을 상대로 맞짱을 뜨기 시작한 순간부터 올림픽은 끝난 것이었고, 성화봉송은 의미없는 불길이 되었다. 올림픽은 중국인끼리의 축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잃은 것은 신뢰와 배려, 윤리, 도덕, 올림픽, 티베트, 중국이다. 그들의 집회 한번으로 전세계인들은 중국에 대한 신뢰와 배려, 그리고 윤리와 도덕, 올림픽, 더불어 중국 자체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래도 그들이 이 사태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고 명목에 충실했다고 외치기만 한다면 그들은 국제깡패로 전락할 것이다.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신뢰이고, 무엇이 중국인지 한국어를 읽을 줄 아는 지각있는 중국 유학생들이라면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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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준의 성희롱 문제의 여파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MBC의 동영상 공개 여부도 큰 관심사다. 동작구로 정동영에 맞서 야심차게 들어온 정몽준은 노현정까지 대동하며 총공세를 몰아넣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골드카드가 빛을 바래고 있다.

그것은 문제의 손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 때에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부분인 성희롱이 문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 진위여부를 떠나 이 사건 자체가 몰고 올 파장이 크다. 정몽준은 짧은 사과로 무마하려 하지만, 이미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전해지고 있고, 여러 루머들이 나돌고 있다.

MBC에선 성희롱 동영상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그건 의혹을 더 크게 만들고, 소문을 더 크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짧은 사과로 마무리 되기엔 일이 너무 커져버린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고 정면돌파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되려면 그 정도 배포는 보여주어야 하지 않는가 싶다.

물론 요즘 국회의원하면 온갖 비리와 파렴치의 온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원래 의미에 충실해야 하는 것 아닌가. 파렴치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라고 하여, 사람들이 파렴치하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을 뽑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표를 던지는 사람은 나 대신 나의 의견을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내 심부름꾼, 그것이 국회의원이 아닌가?

비록 성희롱이라는게 이리 저리 해석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이긴 하지만, 동영상 공개 및 심도있는 사과 그리고 변명하지 않는 진실을 보여주는 배포와 대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판단은 보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성희롱이라고 판결이 난다고 해도 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닌 것이다. 성희롱이라고 문제가 되고 있는 영상을 공개하는 것이 정면돌파의 길이다.

어깨를 만지려하다 실수로 얼굴을 만졌건, 얼굴을 톡톡 혹은 툭툭 쳤건 그 손은 넘어져있는 국민의 손을 잡아주어야 하는 손이다. 손 하나의 영향이 그렇게 클 수 있을까? 물론이다. 사람들은 그 손은 국민들이 표를 던지냐 안던지냐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정동영이 대선때처럼 네거티브를 앞세워 성희롱을 오버해서 운운하지 않는 이상 둘 다 조용히 있는다면 손 하나로 정몽준은 그 동안 공든 탑이 무너질 수 있다.

정말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면, 그 손에 대한 판단을 국민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들을 제공하는 것이 커져만 가는 이 사태를 진정 혹은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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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때만 되면 폭주족들이 난리다. 이번 삼일절에도 폭주족에 의해 단속 경찰이 차에 치여 부상을 당했다. 미국은 경찰한테 개기면 총으로 쏴버린다는데, 우리나라는 폭주족 잘못 건드렸다간 감방간다. 잡으려해도 다칠까봐 잡지도 못하고, 이미 그런 현실을 아는 폭주족들은 더욱 활개를 친다.

왜 삼일절과 광복절에 태극기 휘날리며 폭주를 하나? 그들의 억눌린 감정과 세상을 향한 분노? 혹은 그냥 친구따라 재미있으니 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건 그들은 그 분노를 엉뚱한 곳에 풀고 있다는 것이다.

삼일절과 광복절에 태극기 들고 폭주하는 것은 평일에 그러는 것보다 의미도 있고, 일면만 보면 나름 가상하기까지 하다. 물론 까보면 하나의 빌미일 뿐이긴 하지만 말이다.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나보다.

경찰은 그들의 폭주를 막기위해 처벌을 매년 강화해왔다. 대책도 강구해보고, 올해는 그래도 작년에 비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직도 그들의 무개념 탑재 폭주는 계속되고 있다. 안그래도 한창 사춘기에 반항적일 땐데 자꾸 막는다고 멈춰설 그들이 아니다.

괜히 욱하는 마음에 차로 들이박으면 도로교통법상 완전 덤탱이 쓴다. 페인트 총이나, 그물 총으로 쏘면? 그러다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과잉진압으로 더 골치아파진다. 잡아도 청소년이라 법의 적용을 받기에 한계가 있다. 오토바이는 죄다 훔친거다. 아이구...

어떡하면 좋을까? 답답하기만 하다. 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도 없고, 각자 처한 상황과 그럴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있을 것이기에 이해하는 마음으로 대책을 혼자 강구해 보았다. 멈출 수 없다면, 폭주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토당토하지 않겠지만 이런 건 어떨까?

1. 폭주장을 만들어 준다.
롤러스케이트장처럼 트랙안에 온갖 장애물을 설치해두고, 맘대로 폭주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점프도 하고, 슬라럼도 하고, 트랙 경주도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긴 갖혀있기 싫어서 뛰쳐나오는 건데 얌전히 폭주장에 갖혀있진 않겠지..

2. 오토바이 전용로를 만든다.
오토바이는 인도옆에 하수도길로만 다니게 하는 거다. 넘어오면 벌점 및 벌금을 매기는 것이다. 음.. 이건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된다. ㅋㅋ 피해자가 더 많아 질 것 같다.

3. 폭주 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마라톤 대회처럼 그들의 폭주를 하나의 대회처럼 만들어서 폭주문화를 양지로 끌어내는 것이다. 1등한 폭주팀에게는 상금도 주고, 프로 모터사이클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도 주는 것이다. 그리고 2등한 폭주팀에게는 스턴트맨 교육을 받을 수 있는 6개월 무료 강습권을 주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대회 외에 폭주를 하다 걸릴 경우 대회 참가 자격을 박탈하면 좀 줄지 않을까? 모르겠다. ㅋ

4. 폭주족을 일본으로 보낸다.
삼일절과 광복절에만 개판을 치는 폭주족들의 애국심을 높게 사서, 삼일절과 광복절에 폭주대회를 통해 선발된 정예폭주족을 선별하여, 일본 왕복 티켓과 최성능 오토바이를 제공해줘서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폭주하게 하는 것이다. 몇명만 대대적으로 광고해 준 후 보내주면, 이에 자극된 애국심 투철한 다른 폭주족은 아마도 1년동안 열심히 알바뛰어서 알바비로 비행기표 마련해서 다들 일본에서 폭주하지 않을까? 애국하려면 제대로 하자!


물론, 다 말도 안되는 대책 아닌 대책이지만, 답답해서 적어보았다. 치사하게 고귀한 애국심 들먹이며 폭주하지 말고, 그냥 생각없는 찌질이라 폭주한다고 해라! 찌질이가 아니라 애국심이 있다면 일본가서 폭주해라! 괜히 불쌍한 경찰들과 시민들 다치게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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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후에서 다룬 대형 교회 이야기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이미 대중은 기독교에 대해 등을 돌렸다.
게시판의 글을 한 사람이 도배하는 건지, 여러 사람의 의견인지 모르겠지만, 댓글을 보면 기독교에 대한 사람들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대부분 기독교를 비하한 "개독교"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교회"하면 20여년 전만해도 "가난"의 대명사격 정도되었다. 물론 당시에도 대형교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기억에 의하면 대형교회들의 나오기 시작한 시점은 1990년대쯤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하면 "부의 중심" 혹은 "권력의 중심"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학대학교의 입학 커트라인에서도 변화를 엿볼 수 있다. 1990년대만해도 매우 낮았고, 듣기론 1960년대엔 대학을 다 떨어진 사람들이 거저(?)가는 곳이 신학대학교였다. 그리고 그 당시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현재 대형교회들의 목사를 하고 있다. 목사의 자질에 대해서는 내가 논할 바는 아니기에 넘어가기로 하자.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차산에 있는 장신대의 신학과만 하더라도 서울의 왠만한 4년제 대학 수준의 커트라인은 된다. 신학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다. 내 주위에도 수많은 신대원(신학대학원) 재수생들이 있다.

물론 대형교회가면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이라는 의식에서 신학대학들의 커트라인이 높아진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의 각자의 사명이 있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경쟁률이 높아졌을 것이다. 그리고 60년대 신학대학을 다녔던 현재의 목사님들보다 더 현명한 목사님들이 되어 지금의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해나갈 것이라 믿는다.



 왜 유독 대형교회에 이런 문제들이 많이 생길까? 많은 변명들이 있겠지만, 몸집이 커지는 것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도대체 교회가 왜 커져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양육하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브랜드 교회를 양성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뿔뿔이 흩어져야 할 것이다.

한 교회에 수천명, 수만명하는 신도들이 있다는 건 목사와 신도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이 많이 있으면 힘이 생긴다. 그리고 욕심이 생긴다. 한 주에 걷히는 헌금이 수십억을 넘어가면 당연히 눈이 뒤집히지 않겠는가? 수만명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한다면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대형교회 및 여느 교회들의 특징은 설교시간에 꼭 "우리교회"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우리 교회를 부흥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아져야지, 그게 왜 꼭 우리 교회 신도들이 많아져야 하는가? 그들의 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장로교 교회에서 장로가 되면 죽을 때까지 장로가 되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장로가 되기 위해 장로선거에 수천만원의 로비가 들어가는 것 또한 아는가? 장로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왜, 기를 쓰고 장로가 되려고 할까? 물론 일부 장로님들이 그러시겠지만, 분명한 건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장로가 되면 파워가 생긴다.

 만약 내가 교회용품 회사 사장이라면, 기를 쓰고 장로를 할만하지 않겠는가? 의자 새걸로 싹 바꾸면 회사 10년 매출이 순식간에 생긴다. 예를 든 것 뿐이지만, 이보다 더 상상할 수 없는 병폐들이 많다. 그런 파워가 평생 지속된다면... 수천만원은 아주 작은 투자일 뿐이다.


 파보면 끝이 없다. 뉴스후는 이 문제로만 하나의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그 병폐의 끝은 깊고 단단하다. 대형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대형교회를 쪼개면 된다. 잘게 잘게 쪼개어 한 교회당 300명 이하의 신도만 받을 수 있게 하고, 장로는 매년 투표로 재선임하고, 목사는 한 교회에서 3년에 한번씩 로테이션 시킨다면 대형교회의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물론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독교인 한명 한명이 회개하고 말씀과 기도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목사와 장로가 화해하고, 목사와 사역자들의 관계가 수직적이 아닌 수평적이 되어야 하고, 신도를 모으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주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신도는 흩어지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기독교는 개독교가 아닌, 더 기독교적이 되어야 한다. 세금만 내면 기독교적인가? 목사 월급 공개하면 기독교적인가? 무엇이 기독교적인지 스스로 알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독교의 참모습을 회복하길 바란다. 기독교는 자기들만의 리그가 아닌 세상을 향한 사랑의 외침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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